부활절 셋째 주간 묵상의 글
거듭나야 할 신앙/조건상 목사
베드로전서 1:17-23
그리고 여러분은 각자의 업적에 따라서 공정하게 판단하시는 분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으니 나그네 생활을 하고 있는 동안은 늘 두려운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 받은 헛된 생활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아 시다시피 그것은 은이나 금 따위의 없어질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된 일이 아니라 흠도 티도 없는 어린 양의 피 같은 그리스도의 귀한 피로 얻은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미리 정하셨고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해서 그분을 세상에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진리에 복종함으로써 마음이 깨끗해져서 꾸밈없이 형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충심으로 열렬히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은 새로 난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썩어 없어질 씨앗에서 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앗 곧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났습니다. (공동번역 성경)
순은보다 더 귀한 값
제가 소유한 물건 중 가장 값진 물건은 순 은으로 만든 은 그릇들인데, 교회에서 사용하는 성례 식 때 사용하는 집기들입니다. 이 귀한 은 그릇들은 제가 덴버에서 목회할 때, 덴버시가 문화재 건물로 지정한 1894년에 지은 Asbury Episcopal Methodist Church에서 14년간 목회할 때 사용했던, 그 교회의 전통적인 성례 식 집기들입니다. 예를 들면, 성찬식 때 사용하던 은 접시, 성찬식 포도주 은 주전자, 그리고 세례식 때 사용하던 물 담는 세례 기 등입니다. 제가 그 백 여년의 역사를 지닌, Asbury Episcopal Methodist Church에서 목회할 때, 주위의 아이들의 방화로 그 교회 건물 중 일부가 불이 난 적이 있는데, 그 때 교회 주위의 사람들이 교회 부엌에 들어와 값비싼 물건들은 도둑질해 갔는데, 이 성례 식 집기들은 훔쳐가지 않았습니다. 그 집기들이 순은으로 만든 것인 줄 몰랐던가 아니면, 알면서도 교회에서 사용하는 거룩한 물건이므로 훔쳐가다 간 벌을 맞을까 봐 건들지 못한 것이겠지요. 이들 물건들은 은으로 만든 물건들이지만 오해 동안 잘 닦고 관리하지 않으면 녹이 쓸어 은 그릇의 색갈이 변해 은 그릇인 줄 모르게 됩니다. 제가 그 교회의 유품으로 잘 보관하고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을 읽다가 문득 그 은그릇들이 생각나서, 그 은 그릇들은 닦는 법을 찾아내고 은 그릇 닦는 약품들을 구입하여 지난 몇 일간 이 은 그릇들은 닦느라고 시간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아마도 오늘날 은 값으로 치더라도 꽤 값이 비싼 물건이겠지만, 그것 보다도 백 수십년 동안 교회에서 성례 식에 사용하였던 역사적 가치로 본다면 은 값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교회박물관이 생긴다면 기꺼이 그곳에 기증할 생각입니다. 이 물건 중, 세례기에 담긴 일화도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그 세례기에 담겼던 물을 뿌려 귀신을 쫓아 낸 적이 있으니까요. 베드로 사도는 은과 금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의 간증을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내게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너에게 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니, 일어나 걸으라!”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워 걷게 한 사실입니다. 은이나 금의 가치보다 더 귀한 가치가 그리스도인이 됨 속에 담겨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 값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나그네 생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 생활’과 같을 뿐이라고 말해 줍니다. 나그네의 삶이란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생활입니다. 나그네는 무엇을 많이 지니고 다니는 것도 불편한 것입니다. 간편하게 지니지 아니하면, 많이 지닐수록 나그네의 삶에 짐이 되고 맙니다. 나그네에게 큰 짐을 지고 가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습니다. 비록 나그네일지라도 나그네에겐 가야 할 목적지가 있습니다. 목적지가 없는 나그네는 허망한 나그네입니다. 그냥 갈 데가 없어서 떠 돌아다니는 방랑자입니다. 목적지가 없는 삶은 허탈합니다. 비록 우리가 나그네의 길을 걷고 있다 해도 우리는 거룩한 길을 걷고 있는 나그네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그네는 마음에 허리를 동이고 정신을 차려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우리에게 임할 은혜를 사모하며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뒷모습만 보고 걷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 하거든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을 따르는 삶이 나그네길의 삶입니다.
나그네 길을 걷기로 자취하는 사람은 욕망에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한 삶이어야 합니다. 겉모양을 따라 부르시는 하나님이 아니시고, 행위에 따라 부르시는 분이신 데도 우리를 부르심은 믿음 때문에 부르신 것임으로 깨닫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늘 가지라고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영험을 통해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이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잠언에 “나를 아시는 하나님께 향한 경외하는 두려운 마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잠언 9:10) 거룩한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니,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고 학자가 어디 있습니까? 또 이 세상에 이론가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자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고전 1:20) 우리는 세상 지혜를 따라 살아가는 백성들이 아닙니다. 세상 지혜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리석은 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참 지혜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알게 된 하나님
우리는 막연히 하나님을 찾아 부르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본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철학에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이런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내 존재의 근거이고, 나는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근거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근거이다. 즉 물건이 있다는 것은 그 물건을 만든 창조자가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있다는 것은 신이 존재한다는 근거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할 때, 하나님을 깨달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고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막연히 하나님을 아는 철학적 방법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게 하셨고, 그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부활하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과 전지전능하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거듭남(born again)의 신앙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믿음과 소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신앙을 씨앗으로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썩어질 씨가 아닌 썩지 아니할 생명의 씨를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하여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냐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않고는 하나님나라를 볼 수 없다”하셨습니다. 거듭남이란 다시 새로워진다는 뜻입니다. 흔히 “내가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을 텐데…, 란 가정법으로 쓸 수밖에 없는 죽음과 관련된 문제를 ‘거듭나야 한다’고 긍정법으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거듭남의 복음은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거듭난 신앙을 암시해 줍니다. 이 거듭난 신앙은 썩을 씨가 썩지 아니할 생명의 씨앗이 되는 신앙을 말합니다. 즉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이야 말로, 거듭난 신앙, 거듭난 소망, 거듭난 사랑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격려를 다시 상기하면서 한 주간을 새 소망가운데 살아갑시다. “여러분은 새로 난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썩어 없어질 씨앗에서 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앗 곧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