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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갑현_s.jpg

 

나의 미 동부여행기 3

앞편에 이어...

 

맨하탄으로 향하는 기차에 오르고나니 감회가 새롭게 찾아들었다. 36년 전의 일들이 떠올려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미국에 처음 입국할 때 뉴욕으로 들어왔고, 2년 여 기간을 맨하탄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땐 정말이지 부족하고 철이 없었다. 맥도날드에서 빅맥 하나를 사 먹으면서도 마음 조여옴을 느낄 만큼 준비없이 들어온 탓으로 허둥대면서 살았던 시절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땐, 함께 할 수 있는 교회의 동료 선후배들과 공동체 형식의 모듬살이를 했던 탓으로 서로 위로하며 생활할 수 있었다.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아 어떻게 헤쳐나아가야 할지 판단이 없는 시절이었던 까닭으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일을 전부로 생각하고 일만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그래서였던지 나는 몸이 아파 자리에 눕고 말았다. 아랫배의 통증으로 시달리며 닥터를 찾아다녔고 치료를 받느라 한달 가까이 쉬게 되었다. 그 때만해도 초기 분위기가 다소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닥터 방문과 병원 길을 도와주는 이가 있었으니까. 그때 함께 할 수 있었던 몇 분의 동료 선배님들을 잊을 수가 없다. 오늘이 있는 건 그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 까닭이다. 

 

길지 않았지만 그 분들과의 초기 생활과 미숙아나 다름없는 초년생 생활로  웃지 못할 얘깃거리 등을 떠올려보느라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도착지를 알 수 없어 걱정하고 있었던지 그녀는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나를 흔들었다. 방금 열차가 지하로 들어왔다는 걸 알리면서였다. 나는 그제서야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맨하탄의 펜스테이션은 이 열차의 종착역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내릴 때 우리도 함께 내리면 된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들은 그녀는 화를 냈다. 그걸 왜 이제서야 말하느냐는 것이었다. 미안한 생각에 그녀의 화를 풀어주느라 이것저것 변명거리를 늘어놓게 되었고, 그러고 있노라니 열차는 벌써 종착역 펜스테이션에 다다랐다. 

 

우리는 몇 가지 짐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뉴요커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어 맨하탄의 저녁은 생동감 있어 보였다. 메디슨 스퀘어가든을 뒤로하고 있는 스테이션 입구에 서서 길 건너를 바라보았다. 뉴요커 호텔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호텔 앞으로 다가갔다. 호텔은 여행객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로비 또한 우아하고 고풍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동유럽의 투어리스트들이 대거 찾아든다는 얘기를 들은 바 있었는데 로비는 정말이지 사람들로 빼곡이 차 있었다. 영업이 잘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기쁘고도 좋아 기도하는 마음이 일었다. 호텔 로비를 바라보며 우리는 한참 동안을 멍하니 서 있었다. 정말 감회가 깊었다. 그곳에 기거했던 시절이 다시 떠올려진 탓이었다. 

 

딸아이 집은 기차역에서 그리 멀지 않아 금새 도착했다. 그애는 고층 아파트 앞까지 나와 있었다. 설렘이 있었던 지 우리를 보자 "엄마 ~" 하면서 뛰어왔다. 이 곳으로 이사한 후, 처음으로 찾아온 엄마와 아빠였던 탓으로 반가움이 더해졌는 지 모른다. 아파트 건물은 60층이었고, 사는 곳은 21층 코너였다. 아파트는 제법 커 보였다. 거실의 4면 벽 중, 기역자로 된 2면 벽이 유리로 되어있어 더 커보였다. 다 자라 이같이 독립해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고 있는 딸이 대견해 보였다. 남들은 아이들을 어떻게 길렀는 지 알 수 없지만 내 자녀는 직접 길렀기에 그들의 성장 과정을 기억해낼 수가 있다. 

 

아들과는 달리 딸아이는 쉽게 자랐다. 평범하게 자라 대학을 선택하고 전공과목을 택할 때에도 간여한 일이 없다. 학업을 마치고 직장을 택할 때에도 물론 그랬다. 지금 이 아파트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것 조차도 간여하지 않았다. 성장과정을 간여하지 않았다는 건 크게 도움 준 바가 없다는 의미다. 도움 줄 능력이 되지 않아 그랬는 지 모른다. 아무튼 그랬으니까. 그런 딸애를 대할 때마다 미안하면서도 한 편으론 고맙다. 구김없이 맑은 마음과 밝은 얼굴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어 더 좋아보였는 지 모른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앞집 친구와 음료수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 음료수는 레몬주스였는데 지들끼리 집에서 레몬즙에 당분과 색소를 가미해 만든 탓으로 단맛이 있고, 색깔 또한 예뻤다. 그 친구아이 집앞에 테이블에 그 음료수를 올려놓고 팔았는데 단맛과 신맛이 있을 뿐, 맛은 별로였다. 그런데도 오고가는 사람들은 그 음료수를 사 들고 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면서 사랑으로 아껴주려 하는 그들의 마음을 본 것이다. 정말 값있는 풍경이라 여긴 게 바로 그것이다.  

 

저녁 때가 되어 그 음료수와 테이블을 치운 딸아이는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얼마를 벌었는지를 물어보았다. 딸애는 총 47불어치를 팔았고, 자신은 18불 80센트를 갖고 왔다고 답했다. 왜 절반으로 나누지 않았느냐고 나는 다시 물었다. 그러자 아이는 그 친구는 재료와 장소, 그리고 도구를 제공했기 때문에 도구와 장소에 대한 렌트비와 재료값은 그애 몫이어서 6대 4로 그 이익금을 나누었다고 했다. 정확하게는 전체 매상을 10으로 하여 4대 4로 그 매상을 나누었고, 나머지 2는 재료와 렌트비로 책정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 나라 다움과 직업적인 장사꾼의 한 부분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애는 경제학을 전공과목으로 택했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경제학 공부를 마친 후, 뉴욕에서 직장을 얻어 생활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애 집을 찾아온 것이다.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데 저녁은 외식을 하자며 식당을 가자고 했다. 식당은 미리 예약해놓은 일식집이었고, 꽤 괜찮은 것 같아 보였다. 음식값도 상당할 것 같았다. 그들 부부와 우리, 이렇게 4명의 음식 값이 500불이 넘었으니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딸애는 말했다. 친구 소개로 결혼기념일에 그곳에서 식사를 하며 생각했다는 것이다. 엄마 아빠가 이 레스토랑에 꼭 한번 와보아야 한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가슴이 "쎄" 하는 느낌이 있었다.  마음이 좀 아프기도 하였다. 애들 데리고 식당에 갈 때마다 나는 음식 종류를 보지 않고 가격표 만 보고 음식을 골라주곤 했었다. 그것을 보고 자란 딸아이었던 탓으로 그런 생각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집에 오자 그 일식집 주인의 권유로 사케를 한잔 한 탓인지 졸음이 쏟아져왔다. 그탓으로 나는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아침을 맞은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센트럴 파크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정문 가까이에 도착하자 많은 빌딩들 중, 특히 눈에 든 빌딩 하나가 있었다. 트럼프 타워였다. 미시간 호수와 시카고 강을 내려다보면서 우뚝 서 있는 시카고 다운타운의 트럼프 타워와 비교되는 건물이었다. 98층으로 돼있는 시카고 다운타운의 빌딩보다 낮은 60층의 건물이었으나 가치면에서는 그보다 더 하지 않을까 싶었다. 세계적 관광지인 센트럴 파크를 지켜보고 서 있을 뿐아니라 사방이 짙은 골드빛 유리벽으로 돼있어 무게있는 멋을 지닌 독특한 건물이었다. 트럼프 건물들 거의가 그렇듯, 이 건물 또한 자신의 성을 따 그대로 새겨놓은 "Trump" 라는 글짜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트럼프는 못말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우스갯소리의 의미가 야릇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맨해튼 57가에 우뚝 솟은 이 건물은 1979년 착공하여 1983년에 완공된 빌딩으로서 아트리움과 오피스, 그리고 호텔과 펜트하스 등 다양한 용도의 빌딩이라고 한다. 특히 2016년, 그가 대선에 출마하여 선거운동을 할 때부터는 더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여 그 건물을 빛내주기도 했다. 무려 5조원(37억불)에 달하는 자산가 답게 곳곳마다 그의 빌딩들은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트럼프 타워를 뒤로 하고 정문에 들어서자 마차행렬이 줄을 지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도 마차를 한번 타보기로 했다. 843 에이커이고 341 핵타아르트인 그 넓은 공원을 걸어서 돌아본다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마차에 오르니 역시 걷는 것보다 좋았다. 두루미기를 입고 갓을 쓰면 양반의 마음이 들고, 지게를 지고 논으로 가면 머슴의 마음이 든다는 것처럼 마차에 오르자 귀족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기분이 썩 좋았다. 그러나 마차를 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왔거나 한 번쯤 타 본적이 있는 분들이라서 그러나 보았다. 

 

크고 잘 가꿔진 것으로도 유명하지만 해마다 2,500만 여명이 찾아오는 관광지로서도 유명했다. 영화나 TV를 통해서도 소개되고 있지만 영화촬영 장소로도 유명한 탓에 안내원은 공원 조성시의 역사와 내력까지도 간략하게 소개해 주었다. 센트럴파크는 1853년경에 공원으로 최초 승인되었고, 1857년에 본격적인 공원조성의 프로젝트를 실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경관과 공원조성은 프레드릭 옴스테드에 의해 설계되어졌고, 건축가 칼베르트 바우스가 디자인을 하여 그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그는 "그린소어드"라는 플랜으로 공모전에 응시하여 우승을 차지했고, 그 플랜에 의해 공원조성을 완성했다는 것이었다. 

 

설계를 맡았던 프레드릭 옴스테드는 지금 이곳에 공원조성을 하지 않는다면 100년 후엔 이 넓이만큼의 정신병원이 들어설 것이라 했다고 한다. 그때문에 공공복지를 위한 사회적 가치로서 공원조성의 구현은 도시인의 생활에 필수적이라는 점을 절박하게 피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59년도의 설명문에서도 그는 재차 언급했다고 한다. 공원조성의 목적은 건강-건전한 레크레이션을 즐기고, 기쁨을 얻을 수 있는 최적의 공간으로서 계층에 상관없이 도시민 모두에게 쉼터를 제공하는 데 있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서 공원은 부자와 가난한 자, 노인과 젊은이, 강한자와 약한자, 선인과 악인 등, 모두에게 제공될 쉼터의 공간이라고도 했다는 것이었다. 

 

이같은 그의 설명을 들으면서 두 개의 인공호수와 다양한 산책로, 그리고 두 개의 아이스링크와 정원, 야생동물 보호구역, 동물원, 넓은 자연림, 그리고 매년 여름 세익스피어의 문학축제가 열린다는 원형광장 등을 둘러보는 사이에 마차를 타기로 정해진 45분의 시간이 다 지나갔다.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축제가 열린다는 곳으로 서서히 걸어가 보았다. 마침 그곳에서는 아름다운 한 쌍이 커플이 되어가는 웨딩마치를 하고 있었다. 머리도 식힐 겸, 우리는 그곳에 서서 그 아름다운 광경을 지켜보았다. 들러리로 참석하여 신랑신부와 하객들에게 기쁨을 선사해주려 하는 그들이 미 독립당시의 복장을 하고 위엄과 익살을 번갈아 보여주었던 풍자극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같은 복장으로 단장한 그들은 황태자가 태자비를 맞이하듯 신랑과 신부를 깍듯이 예를 갖춰 맞이하는 장면을 연출하였고, 나는 그 부분을 흥미있게 지켜보면서 황실의 결혼식을 상상해보았다. 새롭게 탄생한 한 쌍의 부부를 마음 속으로 축하해주면서였다. 

 

그외 이곳저곳을 돌아보면서 특히 눈길을 끌었던 건 야생동물 보호 구역과 넓은 자연림이었던 것 같다. 그 구역을 돌아보면서 이 공원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서의 가치는 물론, 자연과 생태계 보존 구역으로서도 충분한 값을 하고 있었다.16세기 헨리 8세의 사냥터로 조성된 땅이 조지 1세(18세기) 때에 이르러선 공원으로 바뀌게 되었고, 그것이 지금의 런던의 하이드 파크가 되어 시민의 쉼터이면서 생태계 보존 공간이 되고 있는 것처럼 센트럴 파크 또한 그같이 시민의 공간이면서 자연과 생태보존 구역이 되고 있었다. 

 

청나라 군이 주둔했으나 청일전쟁에 패한 그들은 물러나고 일본군이 대신 그자리에 주둔하게 되었고, 2차대전에 패한 일본군이 물러나자 그자리엔 다시 승전국의 미군이 주둔하여 미군기지가 된 용산의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이주하게 되므로 그 땅이 시민의 공간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내용의 가사를 생각해보았다. 런던의 하이드 파크와 센트럴 파크가 시민의 쉼터와 생태보존의 공간으로 조성되어 보존되어오고 있는 것처럼 서울의 용산기지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져본 것이다. 센트럴 파크의 곳곳을 두루 살펴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던 것 같다.        

 

이같이 곳곳을 살피면서 구경을 하다보니 점심시간이 넘어서고 있었다. 딸아이는 미리 생각해놓은 데가 있었던 지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하였다. 그곳은 차이니스 식당이었고, 사람들이 많아 30여 분을 기다려야 했다. 식당 안내원은 안으로 들어가기전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했는 지를 일일히 확인하고 있었다. 접종당시 질병관리청으로부터 받은 접종카드 확인을 통해서다. 차례가 되어 우리는 그 카드를 보여준 후,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는 맨해튼의 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좁은 공간이었고, 오래된 듯해 보이는 건물의 실내공간을 젊은이들 취향을 살려 멋지게 리마델링래 놓은 것처럼 보였다. 딸아이는 만두와 잡채덮밥을 시켰고 우리는 호난비프를 시켰다. 음식은 맛이 있었다. 시카고 차이니스 식당의 그것보다 맛이 고급스럽고 좋은 것 같았다. 가격은 시카고의 그것보다 3불 정도 비싼 것 같았으나 맛은 더 좋고, 양 또한 더 많았다. 줄 만큼 주고 받을 만큼 받는 게 옳은 것 같다. 

 

아파트로 돌아와 잠깐 쉬고나니 저녁이 되었다. 저녁에는 그 유명한 타임스퀘어를 둘러보기로 했다. 1904년, 뉴욕타임스 본사가 이주해오면서 롱에이커 스퀘어로 칭해왔던 그간의 지명이 타임스퀘어로 바뀌어 불려지게 됐다는 것으로 거리는 정말 대단하였다.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보행자의 교차로 중 한 곳이고, 브로드웨이의 화려한 극장가일 뿐아니라, 세계 엔터테이먼트 산업의 중심지로서 젊은이들의 몸짓과 목소리가 살아 있는 불야성의 거리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매일 300만 명의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고, 연간 3,900만 명으로 그 숫자가 집계되고 있는 곳답게 거리는 사람으로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빌딩마다 펼쳐져 있는 전광판 상업광고의 불빛은 말그대로 휘황찬란하였다. 별천지가 따로 없었다 "뉴욕은 미국이 아니다. 그러나 뉴욕이 없는 미국은 미국이 아니다" 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 거의는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고, 사람과의 거리는 최선을 다해 유지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점은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딸아이 집을 떠나 다시 트렌턴으로 왔다. 공용주차장에 세워둔 자동차를 찾기 위해서였다. 차를 찾아 타고 밖으로 나왔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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