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시니어 클럽’이 만난 사람 …1. 엄청석 씨
사람,말,땅…또 다른 인생의 시작
임인년 초입에 ‘시카고 시니어 클럽’이 처음 만난 사람은 엄청석 씨(79, 미국명 엄 스테반-버팔로 그로브 거주)였다. 부인 조의숙 씨와 함께 고즈넉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그는 Med Tec`(어덜트 데이케어 서비스) 산하 슈퍼 시니어 대학에서 늦배움의 나래를 펼치며 살고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쾌적한 장소에서 하루를 보내며 글쓰기, 신문 읽기에서부터 우크렐레,키보드 등 악기 배우기,각종 운동 즐기기 등 다양한 방법 속 수업과 함께 도시락을 즐기고 비슷한 또래들과의 교제도 할 수 있어 삶에 든든한 지표가 되고 있다는 것.
“언제나 베푸는 자리에 있을 줄 알았던 내가 미국에 와서 100달러의 크기를 다시 익히며 자제력을 배웠고 내 마음을 다스리느라 엄청난 고통을 치루었죠. 웰페어를 받는 연방 공무원이지 않습니까?”
중소기업 대표에서 54세에 황망한 미국행 결심
“마음 다스리며 100 달러 크기를 다시 익혔어요”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한때 잘나가는 중소기업 대표였다. 서울에 본사를 두고 경기도 이천에 공장을 둔 태흥화학이었다. 가방 원단을 만들어 시판하던 이 곳은 전 직원이 180명 정도, 이천 공장에만 80여 명이 근무했다. 가방원단은 가죽 카시트,방화복,소방 호스, 군용 텐트 등을 업사이클링 하는데 비해 당시엔 주로 레저를 취급했다. 15년 동안 운영하면서 곤지암에 창고를 두었고 주식회사 코리안 나이키 산하 ‘동대문 나이키 샵’ 등 전국에 대리점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경희대에서 행정학과를 전공, 한 때는 정치에 꿈을 둔 적도 있었어요. 처음엔 회사에 다니다 30대 중반 넘어 사업에 눈이 뜨이기 시작했었죠.”
83년도부터 시작한 사업은 올림픽 전까지 승승 장구했다. 가방을 만들어 LA로 보내면 그 제품은 곧 남미로 수출되었다. 97년도 즈음엔 회사 자산이 60억 규모에 이르렀다. 당시 미국 돈으로 환산하면 1000만 달러 수준이었다. 그러나 그 중엔 은행돈도 많아 결국 IMF 때 손을 들고 말았다고 한다. “은행돈 30억이 나를 압박하기 시작한 거지요. 마침내 돈을 한 푼도 건지지도 못하고 ‘옜다 다 가져가라!’ 하고 포기하고 말았어요.”
IMF 여파로 180여 명의 직원들을 눈물로 해산 시킨 아픈 상처를 해결하고 나자 갈 곳이 없었다. ”미국으로 가자!” 이민 가방 2개를 들고 황망한 마음으로 한국을 떠났다. 결국 2000년도, 54세가 되던 해에 처남 조규오 목사가 시온 감리교회(현 로뎀교회)를 맡아 있을 당시에 미국에 오게 되었다. 슬하의 1남 1녀 중 장남은 이미 1994년도인 대학 2학년 때 시카고로 유학왔었고 딸은 대학 졸업 후 98년도에 도미했던 터라 온 가족이 마침내 미국에서 합류하게 되었다.
영주권과 맞바꾼 한 쪽 눈…끊어진 망막 수술 포기
운전수된 아내에게 “당신은 내 영원한 사랑” 고백
“밤 청소 일을 하기도 하고 세탁소 일을 배워보기도 했어요. 그런 와중에 세탁소에서 일하다 표백제가 눈에 튀어 당뇨 합병증이 생겼죠. 결국 영주권과 한 쪽 눈을 맞바꾼 기분이었습니다.”
고교시절에 사고로 다친 오른 쪽 눈때문에 한국에서 공안과를 다니기도 했다는 그다. 한국서의 의상 디자이너의 경험을 살려 아내는 세탁소에서 수선 일을 했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2006년도쯤에 당뇨로 왼쪽 눈이 잘 안보이게 됐어요. 망막이 끊어지게 되어 시력은 0.3 였고 병원에서도 50%정도만 고칠 수 있을 거라면서 각서를 쓰게 했죠. 결국 이민 초기라 치료도 못한 채 그냥 둬 마침내 운전도 못하게 되고 말았어요.”
아들은 콜롬비아 대학에서 방송 음향학을 전공했으나 김민재 부사령관과의 인연으로 한국으로 다시 들어갔다. 구세군에서 신학교를 마친 후 사역을 하고 있고 아내도 구세군에서 함께 만난 일꾼이다. 장녀는 인디애나 스팬서 시의 부 검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손자녀도 두 살짜리에서 고등학생까지 5명이 있다.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6.25도 겪었다는 엄청석 씨. “미국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장로가 되었고, 자녀들 모두 출가시키고 남한테 하대 안 받고 살고 있는 것도 감사하다”고 말한다. 요즘엔 눈이 나빠진 그의 전용 운전수가 된 아내를 두고 과거에 쓴 시를 보여준다.
-캄캄한 새벽은 당신의 공간…/맞벌이 같이 하며 생활 전선 누비며/ 피곤한 몸 이끌고 퇴근 길에 시장 보고/우리 식구들 건강문제 해결하는 당신/…가장으로 책임 느껴 마음이 아프구려/당신은 나의 아내 나의 반려자 영원한 사랑-
“또 어려서부터 집에서 붓글씨를 배운 것이 취미가 되어 60대 이후에는 시카고에서 ‘먹향애’를 사랑해 함께 전시회를 갖기도 했죠.그리고 오래 슈퍼 시니어 대학에 다니다 보니 그 중에서 마음이 잘 통하는 남자들만 10명을 모아 ‘한마음회’를 조직하기도 했어요.”
“할아버지들만 똘똘 뭉친 한마음회라뇨. 무슨 비밀이야기라도 있으세요? 할머니들은 조인할 수 없나요”하고 물었다. 안 된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터뷰를 하고 있는 이날도 한마음회에 있는 동생분이 “형님이 왜 오늘 학교에 안 오셨지?” 하고 궁금증이 나서 인터뷰 장소까지 찾아 나서기까지 한 걸 보며 깔깔 웃었다.
“사람,말, 땅 모든 것이 다른 이 땅에서 살아 가는 것은 또 다른 인생의 시작이었습니다.” 승승장구했던 젊은 시절을 지나 눈물과 고통을 넘어 노년의 삶에 다다른 지금 그는, 아직도 수확의 기쁨이 가득 찬 ‘만추의 계절’을 살고 있다.
(사진 1.노익장의 삶을 즐기며. 2.먹의 향취에 젖어 살던 때. 3. 붓글씨를 함께 즐기던 동료들과 함께.)
1.노익장의 삶을 즐기며
2.먹의 향취에 젖어 살던 때.
3. 붓글씨를 함께 즐기던 동료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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