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을 찾아 타임머신을 돌려볼까? / 강민숙(수필가)

by Youngmo posted Jan 0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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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찾아 타임머신을 돌려볼까? 

    강민숙(수필가)

첫사랑, 풋사랑, 짝사랑, 참사랑... 나는 무슨 사랑을 했었고 또 하고 있나? 어쨌든 나의 첫사랑을 찾으러 타임머신을 돌려보자.

 

서울 수복 후 1954년에도 서울 종로 거리는 불에 타서 검은 숯등걸 뼈대가 보이는 건물, 어설프게 복구된 건물, 요행히 화재를 면한 상가들이 공존하며 복작대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는 불탄 후 공터가 되어 복구를 기다리며 노는 땅들도 있었다.

 

서울 태생인 나는 6.25 전쟁 중 2년은 여주 외가에서 2년은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했다. 그 후에 서울로 와서 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하여 촌티 나는 전학생이 되었다. 방과 후에는 혼자서 종로 네거리를 천천히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집으로 갔다. 종로 네거리 공터에 신신백화점 건축 설계도를 세워놓은 자리에서 길 건너 보신각 종각이 재건된 것을 보고, 1층만 복구된 화신백화점을 들리고, 타버린 붉은 벽돌의 청년회관(YMCA) 자리에 서서 건너다 보이던 여러 서점들을 생각했다.

 

하루는 화신백화점 건너편 공터에 곡마단 천막이 높게 세워진 것이 보였다. 서커스가 보고 싶어 천막 입구에서 얼마를 기웃거리고 있었던지 문 지키는 아저씨가 들어가라고 하셨다. 천막 안에는낭랑 18라는 노래가 낭랑하게 퍼졌고 거적때기를 깔고 앉은 몇 안 되는 청중들이 있었다. 노래 부르는 가수는 긴 빨강치마에 노랑저고리를 입은 6, 7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였다. 감동의 황홀한 시간의 여유도 없이 이것이 마지막 순서였다. 연이어 그 또래의 소년이 나와서 끝맺는 인사말을 하고 있었다.

 

하이칼라 머리에 신사복을 빼 입은 무대 위의 소년을 보는 순간 나는 가슴이 방방 뛰었고 6.25 전에 딱 한 번 만났던 어린 왕자 같았던 소년이 생각났다. 6.25 전부터 스무 살의 가수 지망생인 작은 외삼촌이 우리집에 살면서 악극단을 따라다녔다. 그 악극단은 가끔 지방공연을 가기도 했지만 내가 본 서울공연에서 외삼촌이 단역을 해서 많이 섭섭했다. 하루는 외삼촌을 따라 악극단이 연습 중인 종로4가에 있는 극장에 갔다. 그 때 보았던 어른들이 지금은 모두 타계하신 원로 가수들이다.

 

무슨 일이었는지는 모르나 외삼촌이 나에게 집으로 가야 한다고 두세 살 더 먹었을 오빠만 한 소년과 같이 가라고 하셨다. 그 소년은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신사복에 나비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고 있었다. 말끔하고 시원한 눈매의 조각 같은 얼굴이었다. 내가 본 오빠들이나 동네 아이들과는 달랐다. 나에게는 꿈이나 동화에 나오는 왕자님 같았다.

 

외삼촌은 우리에게 지금의 택시 같은 역마차를 태워 주셨다. 말 한 마리가 끄는 작은 포장마차인 역마차 속에서 우리들은 한마디 대화도 못했다. 가끔 마부 아저씨가 포장 사이에 얼굴만큼 뚫린 구멍으로 별일 없는가 뒤돌아보며 말 채찍을 들고떨거덕 떨거덕하는 말발굽 소리에 맞추어 추임새 같은 소리를 냈다. 역마차 승객은 우리 단둘이었다. 나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숨쉬기가 어색해졌다. 고개를 숙이고 고무신 신은 나의 맨발을 보니 부끄러웠다. 동네에서는 꽃고무신이 뽐낼 만했었는데...

 

짧은 단발 머리도 진작 길러서 공주 머리처럼 치렁치렁하게 치장할 걸... 어느 결에 왔는지 화신백화점 앞에서 역마차를 내려야 했다. 어쩌다가 택시나 전차가 지나다니는 한산한 종로길을 건너고 서점들 사이에 골목길을 찾아 내가 앞장서서 집으로 갔다. 엄마는 나의 왕자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셨고 나는 공연히 수줍어서 딴청을 하는 동안 왕자님은 곧바로 되돌아갔다. 그 후로 혼자 마음을 끓이고 있는 동안에 엄마와 외삼촌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으면 나의 왕자님은 부모없이 오갈 데 없는 고아로 악극단에서 기르고 있다고 하셨다. 역시 동화책에 나오는 마법에 걸린 불쌍한 신세의 왕자님이 분명했다.

 

1954년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오다가 서커스에서 보았던 어린 소년 소녀들이 고아들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6.25 전쟁 중 힘들고 무서운 일을 많이 보았지만 의지가 되고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제일 가슴 아팠다. 어디에서 든 나의 왕자님은 마법을 벗어나서 당당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겠지. 그렇기를 빌었다.

 

이것이 풋내나 서 첫사랑이 아니라면 나의 타임머신을 다시 돌려보자. 9.28 서울 수복 때 서울집이 폭격에 없어져서 집 없는 고생을 했다. 여중 1학년 때 이사를 했다. 골목에 한 고교생이 지나가면 좁은 골목이 환해지는 듯했다. 멀리 교모를 쓰고 지나가는 뒷모습을 보아도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려 숨고 싶었다. 그의 여동생 정이가 나와 동갑이라 친구가 되었다.

 

여름방학 때 아침마다 남산에 올라가서 약수를 받아오자고 했다. 물론 그의 오빠가 앞장선다고 했다. 새벽 해 뜨기 전 식구들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고요한 아침에 남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남산에서 멀지 않은 우리 동네에서 집을 나서면 지난 밤의 마지막 영화가 끝나고 퇴색한 텅 빈 중앙극장 마당에 쓰레기 조각들은 아직도 잠들어 있었다. 명동성당 지붕위의 뾰족탑을 멀리 스치고 남산 산책로 중간쯤 가서 북악산 품 안의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면서 벅찬 가슴을 가다듬었다. 뒤돌아 산비탈을 조금 더 올라가면 신록이 우거진 숲속 남산 중턱에 약수터가 있었다. 약수터에는 벌써 약수를 마시고 가져온 통에 약수를 받는 사람, “~ ! ” 를 외치는 사람, 맨손 체조를 하는 사람, 등등 항상 10여 명 정도는 오며 가며 있었다.

 

새벽안개가 많은 날이 있었다. 남산 아래 여명의 안개 바다속의 서울은 보이지 않았다. 발을 헛디디는 것 같았고 꿈나라를 헤매는 것 같았다. 아련히 떠 있는 산봉우리들은 많은 것들을 그려 볼 수 있게 하였다. 무슨 생각에 잠겨 걸었는지 어슴푸레한 안개 속에서 시커먼 나무들이 성큼 눈앞에 다가올 때는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나는 놀란 것도 즐거워 정이와 키득거리며 정이 오빠와 같이 있다는 것이 좋았다. 곱게 접은 손수건으로 이마에 물안개 같은 땀을 찍어 내기도 했다. 잠꾸러기인 내가 그 여름방학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서 남산 약수터에 다녔다.

 

아쉽게 우리집은 또 이사를 했다. 간간이 소식은 들었다. 그는 다른 나라에 살고 있다고이것도 첫사랑에 미흡하다면 다시 나의 타임머신을 돌려 볼 것이다. 그리고 현재 또 미래 진행형이라고 한다면 누가 뭐라고 할까?

 

 

 

 

 

 

 

 

 

 

 

 

 

 

 

 

 

 

 

 


*제안 혹은 질문이 있는 경우 imseniorweb@gmail.com으로 연락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