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금 밖을 뛰어넘는 굵은 희망줄(신정순 박사)

by Youngmo posted Jan 0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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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미순의 시세계:금 밖을 뛰어넘는 굵은 희망줄

 

 

               신정순(국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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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미순의 시세계; 금 밖을 뛰어넘는 굵은 희망줄

신정순(국문학 박사)

 

 

 

1. 배미순 시인의 시는 어렵지 않다현대 시에서 종종 등장하는 난해시의 흔적도 거의 없고 괄호 넣기 수법도 사용하지 않아 누구에게든 쉽고 친밀하게 다가온다시인의 시는 맑고 슬픈 정서, "언제나 유순"하고 "다른 사람이 즐겁고 빛나기를 바라는시적화자의 따뜻한 마음술술 읽히는 유연한 문장들로 인해 자칫 깊이가 얕은 시가 아닌가라는 의심을 수도 있다하지만 그의 전체 시에 나타난 인생에 대한 통찰력과 사유의 깊이는 결코 만만치 않다작가 자신이 직접 체험해야 했던 이민자로서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절벽처럼 다가오는 죽음 인식에 대한 강한 통찰이러한 절망감을 극복하는데 필요한 존재론적 사유는 시인의 시를 다만 감상적인 서정 시인으로 국한시킬 없는 이유가 된다.

 

먼저 시인의 1970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묵시> 들여다보자.

 

 

 

해거름에 부서지는 산그늘

 

깊이 속에서 나는 보았네.

 

오래 잠들고 있던 잔별들

 

손가락사이로 빠져 달아나고

 

바람이 몰고 겨울저녁을

 

갈대는 하얀 머리를 날리다 떨고 있었지.

 

추수가 끝난 들녘에 남아 있던

 

꿈의 뼈아픈 목울음

 

아직도 살아서 소리치는가.

 

오오래 풀리지 않는 안개 같은 하루를

 

아직도 살아서 꿈틀거리는가.

 

눈처럼 차오르는 그대 영혼의

 

맑은 사랑

 

눈물

 

빛나는 목숨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며

 

드디어

 

나를 천상의 높이에까지 끌어올린다.

 

문득 우연한 때에

 

달빛에 금이 나의 회억은

 

죽음의 과즙과도 같은 수면,

 

단단한 살과 뼈를 뚫고 들어가

 

언어가 되고시가 되고

 

순금의 묵시가 되어

 

가장 깊은 자리에서 자맥질하고 있다.(<묵시>, 부분)

 

 

 

시에서도 "갈대", "하얀 머리를 날리다 떨고 있었지", "안개 같은 하루" 다소 감상적 시어인 같지만 시어들은 "빛나는 목숨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며드디어/천상의 높이에까지 끌어올린다", "죽음의 과즙과도 같은 수면 단단한 살과 뼈를 뚫고 들어가언어가 되고시가 되고순금의 묵시가 되어" 충돌하면서 순도를 높이며 죽음을 관통하는 존재론적 사유의 깊이를 획득한다.

 

 

 

2. 또한 시인의 시는 이민자 시인으로서의 정체성에도 소홀하지 않다이민자 의식이 생명력과 연결될 때는 다소 당돌하기까지 하다.

 

 

 

풀씨더러 어디

 

요기 요만큼만

 

날아가라 하겠더냐

 

 

 

땅따먹기 하던

 

어린 시절

 

공기돌은 언제나

 

금밖의 세상이 그리웠지

 

 

 

풀씨도,

 

공기돌도 그렇거늘

 

하물며

 

풀씨보다 가벼운 우리

 

공기돌보다 용감한 우리

 

 

 

그리운 넘고 넘어

 

멀리까지 날아와

 

끈질긴 생명력으로

 

수천수만의

 

풀씨를 만드나니, (<풀씨와 공기돌>, 부분)

 

 

 

이민자 의식은 "요기 만큼금을 그어놓은 안에서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밖의 세상으로 튀어나가고자 하는 공기돌로 은유되면서 역동성을 발휘한다.

 

 

 

또한 시인은 이민자들의 헤매는 인생살이를 <집으로 가는 >에서는 방향 잃은 자아로, <누가 발치에>에서는 웅덩이에 빠진 자로 정체성을 밝힌다.

 

 

 

당신은 아는가

 

집으로 가는 길을.

 

일상의 틀을 깨며 살기 위해

 

우리는 멀고 낯선 곳에서 짐을 풀었다

 

당신은 그쪽

 

나는 이쪽

 

밧줄처럼 팽팽히 붙들고 있는 사이

 

아래로 아래로

 

재빨리 뿌리 내리는 알지 못해

 

수많은 미지의 날들을 탕진했다

 

따뜻한 불빛 하나 내어 걸지 못했다

 

쓸쓸히 돌아오던 지친 발자욱 소리

 

아뜩한 시간들 속수무책 흘러가도

 

붙잡지 못했다 붙잡을 없었다

 

갈림길은 밤낮없이 튀어나왔지만

 

아무도 마중 나오는 없었다

 

(중략)

 

정신은 때로 아뜩해졌지만

 

사랑 내어던지며 수는 없었다

 

 

 

당신은 아는가 언덕 아래

 

집으로 가는 길을 (<집으로 가는 >, 부분)

 

 

 

기다리는

 

화려한 꽃밭인 알았다

 

나의 시간나의 때인 알았다.

 

목까지 차오르는 고통의

 

배반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에도

 

기다리는

 

화려한 오방색 꽃밭인 줄만 알았다.

 

 

 

누가 발치에

 

슬픔의 웅덩이 하나 숨겨 놓았을까

 

아아쉽사리 건너지 못할

 

시퍼런 질곡의 웅덩이 하나 (<누가 먼발치에>, 부분)

 

 

 

에릭 H. 에릭슨에 의하면 자아의 정체성은 내성(introspection) 의해 자각되는 주체적 의식만을 의미하지 않고 다른 자아들과의 상호적인 대인관계역할론적 개념에서 파악된다고 한다 (박아청, <Erickson 아이덴티티론교육과학사, 1998, 16). 시인은 미국 생활이 결국 잃은 자의 생활이며 "오방색 꽃밭"으로 표상되는 아메리칸 드림이 실은 "시퍼런 질곡의 웅덩이"임을 간파한다.

 

 

 

3. 또한 시인의 현실인식은 죽음 의식에 다다르면 "하늘이 종일 흐린 ", "흐린 하늘은 있는 다해아픈 사람을 잔뜩 내리누른다"(하늘이 종일 흐린 )라고 하면서 더욱 우울한 정서를 표출한다또한 죽음은 누구에게든 다가서면 후퇴하지 않는 막강한 힘을 가진 것이다. "누워서도 끝내 쓰러지지 못하는 나무", '겨울나무의 직립'성을 가진 존재라 할지라도 죽음을 비껴나갈 없다그리하여 이러한 사유는 "막다른 골목만 같아 낙엽처럼 바스라지는" (<당신을 향한 '기막힌 맑음'>) 절망감으로 이어지고 그와 나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 방에 고꾸라지고 피상적인 껍데기만 남아 몸부림치는" (<내가 달라졌다>) 절망을 낳는다이러한 죽음으로 인한 철학적 사유는 맑은 시어들에게까지 침투해 들어간다. < 꽃분홍>에서는 "우리는 어느 누구도 감히되돌아오지 못하는 길을 가고 있다./ 되돌아온 사람은 없었다."라고 철저한 부재감을 노래한다하지만 죽음 혹은 부재로 인해 달라진 "껍데기"로서의 존재는 그저 바스라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여기에 놀라운 시인의 역동성이 발휘되는데 이는 순환적 시간에 대한 사유가 낳는 봄의 생명력과 이어진다시인의 세계는 직선적 시간의 흐름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봄이 되면 어깻죽지에도

 

날개가 돋친다.

 

노랑에 파랑을 섞고

 

파랑에 빨강을 섞어

 

종일 나만의 들판을 만든다

 

들판 세상으로 날아가

 

드디어 용감무쌍,

 

크고 굵은 희망줄 하나 낚아챈다 -(<봄은 날개가 있다>, 부분)

 

 

 

사계절 봄을 택한 영혼의 날개는 응축이 아닌 "희망줄" 낚아채고 확장의 세계로 나아간다내가 처한 현실은 "온통 안간힘과 어깃장 투성이"인데 "문밖의 몸은 어느새 실핏줄처럼 몸속으로 흘러 들어와" (<봄의 리듬>) 봄의 체휼화가 시작된다여기서 인생은 커다란 변별점을 갖는다또한 봄의 시간은 하루의 시간 중에서는 아침의 시간을 택한다. "밤에는 우는 일이 있을 지라도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사슴의 노래>)라며 아침의 상상력과 결합하면서 시적화자는 새로운 찾기를 모색한다성실한 순환의 성질을 가진 아침은 "지친 새들도 비상을 시작한 아침어제의 해가 아닌 오늘의 하루치씩의 햇살이 들리는 힘찬 희망의 수레바퀴 소리들리나요들리나요?" 이어지면서 새로운 찾기가 계속됨을 예고한다그리하여 시간의 직선적 연장에서 오는 "웅덩이" 표상되는 어둠과 죽음과 이별은 시간의 들판에 금을 그어놓고 밖으로 날아간다.

 

 

 

시인이 일찌기 노래했던 '공기돌' 이제 안에 머무는 공기돌이 아니다또한 금은 조국과 외지로서의 미국의 국경선을 의미하는 장소적 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이는 모든 존재가 통과해야 하는 시간의 금이기도 하다잠시 머무는 시간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건 "무수한 흐름 속에서의 간이역" 통과하는 것이었을 갇혔던 것들은 밖으로 튀어나가고 새처럼 자유로우며 겨울엔 하강했을지라도 봄이 되면 막강한 생명력으로 죽음의 간극마저 지나 시간의 들판에서 "세찬 몸부림"으로 튀어나온다.

 

 

 

4. 시인의 시에서 빼놓을 없는 주제어 하나 언급하고 싶다그건 바로 사랑이다.

 

 

 

둘이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라 했던가요?

 

이제 모든 것은 새롭게 출발합니다

 

머지않아 노을이 지고 해가 저문다 해도

 

나와 당신 사이당신과 사이

 

영원한 간극 메울

 

사랑이 있는 ....... (<해가 저문다 해도부분)

 

시에 이르면 시인이 그토록 노래했던 아침과 봄의 시간생명의 노래는 어쩌면 모두 사랑이라는 영토에 도달하기 위한 방향성을 가지며 나아가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든다.

 

 

 

5. <꽃들은 바쁘다>. 이번 시집 출간은 배미순의 적잖은 시인으로서의 흐름에서 하나의 간이역이었다고 생각한다다음 간이역에선 어떤 노래가 쏟아져 나올 분명 감동적인 글이 나올 거라고 기대하며 기다려진다모든 결핍의 자리에 하나 착하게 떠있다. <꽃들은 바쁘다>라는 시집은 그래서 새벽의 기쁨으로 이민문학의 한계를 지나 밖을 벗어나는 공기돌이 되어 환하게 떠오른다.

 

 

 


*제안 혹은 질문이 있는 경우 imseniorweb@gmail.com으로 연락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