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 동부여행기 2 전갑현

by Wes posted Dec 31,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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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편에 이어... 

 

그같은 딸아이의 전화를 받고 우리는 그애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그것은 내가 제안해 결정된 일이었다. 

 

근래에 들어 애들의 말이나 의견을 곧잘 받아들이곤 한다. 물론 따를 때도 있다. 그들의 의견이 제법 여물어 있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다. 무엇보다 그들도 이젠 직장인으로서 사회의 한 구성원일 뿐아니라 이 나라에서 나고 자라 이 나라 교육을 받은 이 시대의 이성과 정신을 가진 성인(成人)인이라는 생각을 갖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3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그들의 의견을 귀기울여 듣고 따를 수도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싶어 하였다. 그들의 사유영역과 활동범위는 점점 깊고 넓어질 뿐아니라 내 삶의 폭은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서 겸손의 미덕을 배우고 쌓아가는 건 나이가진 삶이 취해야할 바른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 것이다. 낮아지고 물러날 줄 아는 마음 또한 그 마음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그래보고 싶었다. 모노피엘라 강과 엘리피니 강물이 오하이오 리버로 흘러들어 건물숲의 찬연한 불빛을 반추하고 있는 그 세 강줄기의 불빛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포도주를 곁들인 스테이크로 그 저녁을 맞아보고 싶었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젊은 시절에 놓치고 간 그 세월을 보상받고 싶어 한 까닭인지 모른다. 비록 스테이크에 포도주를 겸한 단순 디너의 저녁이었지만, 어쨌거나 그래보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생각과 바람을 접어야만 했다. 딸아이 말대로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전 최우선으로가 여행 출발시 했던 다짐 중 최고의 다짐이었음을 상기한 것이다. 요즘따라 부쩍 그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운전을 할 때, 끼어들기로 앞을 막고 드는 타의 자동차를 대하여 무한 양보와 서행으로 안전운전을 하자는 것이라든가, 옆 차도는 비어있고, 내 차도는 막혀있다 해도 차도를 바꾸려 기웃거리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게 바로 그것이라 할 것 같다. 마트나 공공 장소에서 줄서기 할때에도 내가 서있는 줄이 텔러의 몸동작 더딤으로 진행 속도가 늦어진다 해도 옆줄을 바라보며 두리번거리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여유있게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보자 했던 점도 그것 중 하나일 듯싶다. 몸의 행동체계와 마음가짐의 질서를 바로 세우는 건 나이 듬과 함께 익혀가야할 삶의 과제로서 덕목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해본 까닭이다.  

 

스테이크로 한끼의 저녁을 마친 우리는 포도주 축제는 호텔 룸에서 하기로 하였다. 하여 밖으로 나온 우리는 포도주 한병을 사 들고 호텔을 향해 차를 몰았다. 흐르는 강물이 바라보이는 강변도로의 드라이브는 우리의 기분을 한 껏 고양시켜주고 드는 것 같았다. 세개의 강물이 합류해 흐르는 그 도시의 눈부신 불빛이 환하게 펼쳐진 풍광은 아름다웠고, 우리는 그 전경을 드라이브를 통해 둘러본 것이다. 정말 밤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그 강변도로를 달리면서 나는 언젠가 읽은 적이 있는 오하이오 리버를 중심으로 일어난 남북전쟁 당시의 일화 한 꼭지를 떠올려보았다. 

 

전쟁이 일어나자 노예제 폐지를 위해 싸운 북군의 병사들을 이끌었던 지휘관이고 사령관이었던 윌리옴 셔먼 장군과 율리어스 그랜트 장군은 오하이오주 출신으로서 전투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리고 그때, 오하이오 주는 북군의 병사들 중, 34만 5천여 명의 병사들을 모집하여 배출하고, 그들로 하여금 전투에 임할 수 있도록 독려를 한다. 그후, 그러니까 1863년, 당시 모건즈 라이더라 불려지고 있었던 남군의 기병대가 오하이오 주로 진격해왔고, 북군의 셔먼 장군 휘하의 병사들은 그들을 대적하여 치열한 전투를 하게 된다. 바로 이때, 북군은 지휘관과 병사들이 합심으로 단결하여 그 전투를 승리적으로 이끌고, 남군의 기병대를 이끌고 진격해왔던 지휘관 존 헌트 모건 장군을 컬럼비아나 카운티 전투에서 생포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적진의 군영 탈출을 계획하고, 결국 성공하게 된다.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던 사건으로, 그야말로 영화 같은 그 탈출 스토리를 떠올려본 것이다.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오하이오 주는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주민들이 압도적 다수였고, 그들은 목숨을 걸고 탈출해온 노예들이 오하이오 강을 건너 자유를 찾아 캐나다로 갈 수 있도록 그 강물의 길을 열어주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읽은 적이 있다. 오하이오 리버를 중심으로 있었던 그 역사적 사건의 스토리를 감동적으로 읽은 적이 있었던 터라 그 강을 바라보게 되자 그대목이 떠올려졌던 게 아닌가 싶다. 

 

그같은 뜻과 의미를 담고 있는 그 강을 휘고도는 강변도로의 드라이브는 정말 좋았다. 아마는 그같은 생각에 잠길 수 있어 더 그랬는지 모른다. 

 

드라이브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집에 왔을 때, 딸아이가 사와 마셔본 적 있는 그 포도주 저스틴 호프로 우리식의 포도주 축제를 하였다. 그리고 그 술이 향과 함께 어느정도 취기를 올려줄 무렵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을 맞았다. 우리는 서둘러 아침시간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다. 다음 행선지 뉴저지 트렌턴은 4시간 정도의 드라이브 구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늦지는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호텔의 브렉퍼스트를 마친 후, 짐을 꾸리고 차에 몸을 실었다. 다음 행선지인 트렌턴의 그 친구집을 들르기 위해서였다. 

 

80번으로 왔던 자동차는 피츠버그를 향하면서 70번으로 들어서게 되었고, 트렌턴으로 가는 길 역시 그 70번으로 가야했던 탓으로 70번 진입로를 찾아 들어서야 했다. 그러나 그 70번 국도는 왔던 길이었던 까닭으로 금세 찾아들 수 있었다. 

 

피츠버그에서 뉴저지 트렌턴으로 이어지고 있는 70번 고속도로는 산맥을 가로지르는 길이었다. 굴곡과 커브가 많아 운전자에게 긴장감을 주는 도로였을 뿐아니라 위험성까지 내포하고 있어 두려움을 주는 길인 것 같았다. 산맥을 직선으로 뚫어 건설해 놓은 네개의 긴 터널을 통과해야 할만큼 높은 고지가 많은 길이기도 하였다. 캐나다에서 시작하여 웨스트버지니아까지 뻗어있는 앨러게니 산맥과 역시 캐나다에서 시작하여 노스캐롤라이나 미첼산까지 뻗어있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관통하고 있는 길이었다. 그 두 산맥은 정말이지 거대하고 높았다. 

 

캐나다에서 시작하여 멕시코까지 뻗어있는 서부의 로키산맥이 중부와 서부를 가르는 장엄한 산맥이 되고 있다 한다면 역시 캐나다로부터 노스캐로나이나까지 뻗어있는 동부의 거대 산맥 중 하나인 애팔래치아 산맥이 동부와 중부를 가르는 거대 산맥이 되고 있다 해야 할지 모른다. 어쨌거나 그 두 거대 산맥이 각각 동부와 서부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니까. 

 

그 산맥들 중, 우리가 지금 통과하고 있는 애팔래치아 산맥은 평균 높이가 1Km 정도이고 가장 높은 곳은 2.03Km이다. 또 하나의 산맥으로서, 앨러게니 산맥은 그 길이가 640Km 정도라 하니 그 두개의 산맥이 얼마나 거대하고 높은지 가히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높은 고지를 올라갈 때마다 항공기의 고도 하강으로 귀가 먹먹해지는 것처럼, 그 귀 먹먹함으로 정신이 다소 어두워지는 불편을 겪어야만 하였다. 그같은 상황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이 그같은 불편과 두려움만을 주는 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산들로 이루어진 그 두 산맥에 펼쳐진 단풍숲이 아름답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가을 단풍의 절경으로 단장하여 자태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동부의 그 산들은 이번 여행의 목적을 채워주고 있기라도 하는 듯, 우리에게  큰 기쁨을 주는 것 같았다. 

 

시카고에 살고 있는 나는 버지니아 리치몬드를 몇차례 다녀온 바가 있다. 물론 드라이브를 통해서였다. 그 때마다 나는 10월과 11월 사이를 다녀올 날짜로 선택하곤 하였다. 버지니아와 웨스트버지니아 사이엔 거대한 애팔레치아 산맥이 남북으로 뻗어있고, 리치몬드에서 웨스트버지니아를 거쳐 캔터키를 통해 일리노이로 돌아와야 하는 나는 64번 국도를 타고 그 산맥을 넘어야만 했다. 리치몬드로 갈 때에도 물론 그 길로 가곤 하였다. 그 64번 국도를 타고 그 산맥을 넘을 적마다 그 산맥의 거대한 단풍숲이 드리우고 있는 가을산의 절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그 단풍의 아름다운 비경에 젖어 몽혼의 기쁨 같은 걸 느끼기도 하였다. 그 가을산과 단픙숲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 산맥을 넘을 적마다 나는 설악산을 찾아들기 위해 한계령을 넘어갈 때, 만날 수 있는 외설악의 절경이 그 산맥의 아름다움과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감탄에 젖어들기도 하였다. 

 

한번은 그랬다. 그 길을 지나갈 때, 간이 휴게소에 차를 세워둔 채 한시간 여정도를 그 단풍산의 비경을 바라보면서 멀거니 서있었던 적이 있었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나는 그때, 쉽게 발길을 돌려 차에 오를 수가 없었다. 그림을 그릴 줄 알았더라면 더욱 행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 산맥의 가을산을 멀거니  바라보면서 혼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던 것이다. 그 가을 산의 전경이 말그대로 한폭의 그림으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그때 그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그같은 감탄의 지속과 함께 70번 국도를 타고 그 아름다운 단풍산맥을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일리노이 주는 하이웨이에서 달릴 수 있는 속도를 65마일로 제한하고 있는 데 반해 오하이오나 펜실베니아 주는 구간구간에 70마일로 달릴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어 그런 지 자동차의 속도는 매우 빠른 것 같았다. 많은 차들이 우리를 추월하여 앞질러 가고 있음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큰 트럭이 그같이 빠른 속도로 달리는 것 같았다. 하여 나는 바짝 움츠러든 자세로 운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정오가 되어가자 차는 뉴저지 트렌턴에 들어서고 있었다. 지피에스를 따라온 탓으로 그 친구 집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도착하기 전 그에게 전화를 먼저 걸었다. 도착했다는 걸 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반가움으로 들뜬 마음이 그같이 전화를 먼저 하게 했는 지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전화를 했고, 그는 그 전화를 받았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집앞 길까지 나와 있겠다는 언질을 주고 들었다. 안그래도 된다는 대도 그는 막무가내였다. 그도 뜨거운 마음이 있어 그랬는 지 모른다. 

 

그 부부와 우리는 가깝게, 그리고 찐(진)하게  마음을 나누면서 17년 여동안을 함께 해온 사이다. 그 17년은 시카고에서 함께 지내온 기간이고, 뉴저지 트렌턴으로 이사한 후로도 줄곧 친하게 지내왔으므로 합하여 34년 여동안을 함께 해온 사이인 셈이다. 이제와 따져보니 강산이 세번 하고도 반이나 변할 수 있는 세월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와 나는 맞는 부분도 있지만 안맞는 구석도 많이 있다. 어쩌면 안맞는 점이 맞는 것보다 더 많을지 모른다. 다툴 때도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나는 그에게 말해준 적이 있다. 다툴 때 다투더라도 칼이 물베는 다툼질을 하자고 말이다. 그 말을 너그럽게 받아준 탓인지 그는 그 말의 의미를 행동으로 반응해주곤 하였다. 그때마다 나는 생각해보았다. 그는 나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좋아했는 지 모른다. 

 

차가 그 집앞을 들어서자 그는 여기라는 투의 입모양을 지어 보이면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올린 어깨가 귀가 닿을 정도로 어깨를 높이 올린 채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마는 그의 몸 안에  반가움과 뜨거움이 뒤섞여 있어 그랬는지 모른다. 

 

차가 들어서자 그는 주차하기 편리한 곳으로 차를 안내하고 들었다. 나는 그가 안내하여 지적해준 곳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내 앞으로 다가와 말했다. 바로 옆에 주차되어 있는 차가 자기 차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지시해준대로 그 차를 바라보았다. 차는 앞쪽 모서리에 상처가 있었다. 나는 그 상처를 모른 채 하려했다. 그러나 그는 나와는 생각이 달랐던지 말하고 들었다. "아, 여기 찌그러진 거, 어떤 놈이 박치기를 했어요, 나원참" 하면서 차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자기 잘못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이면서였다. 

 

그때 나는 생각하였다. 나의 막역지교(莫逆之交) 그 친구를 또 한번 생각해본 것이다. 

 

묻지 않았는 데도, 자신의 치부일 수 있는 찌그러진 그 차가 자기 차라는 걸 스스럼 없이 말해주고 있는 그의 구김없는 마음을 다시 한번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늘 그래왔다. 자신의  속사정이나 마음 속 깊이에 감춰둔 수치성이 있을 법한 은밀한 내용까지도 거리낌없이 드러내보이곤 했다는 게 바로 그것이다. 그린 그림이 바라보기 민망할 정도인 데도 그려진 그 그림을 자신의 것이라고 거침없이 보여주는 어린아이처럼, 계산 안된 그 마음을 여과없이 보여주곤 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계산없이 드러내는 곧고 깨끗한 품성으로서 그가 가진 성정의 한 부분이 아닐까 싶었다. 어른이 된 후에도 그같은 품성을 지니고 있는 건 인격의 한 부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나는 그의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다. 마음이 다칠만큼 다툰 후에도 먼저 전화해 웃음을 주려는 마음이 그래서 일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그의 안내를 받아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부인은 점심을 준비해놓은 채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를 보자 부인은 허그를 해주면서 반가운 마음으로 맞아주었다. 나는 그때 차려진 밥상을 보았고, 그 밥상이 예사 밥상이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고 "아니,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요?" 라고 말했고 부인은 "아니, 17년 만인 데 밥 한끼 배불리 못먹겠어요?" 라고 응수해주셨다. 

 

나는 중간에 한번 만난적이 있지만 우리집 그녀와는 17년만인 것 같았다. 

 

그 부인의 탁월한 요리 솜씨를 나는 잘 안다. 그러나 그 날의 점심상은 내가 알고 있는 그 솜씨 이상이었음은 물론 성의까지 담겨있어 맛과 즐거움이 한층 더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기뻤고, 감사한 마음이었다. 

 

80년대 중 후반부터 2004년도까지 그분들과 함께 한적 있는 시카고에서의 생활은 이민 초기였던 탓으로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분들과 우리는 그 시절 그 어려움 속에서도 서로 마음을 기대고 의지하면서 그 생활을 함께 극복해온 것이다. 그때문에 피차는 반갑지 않을 수 없었고, 그 시절 얘기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이야기로 회포를 풀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되었다. 할 얘기가 너무 많았으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 꽃을 피우다보니 시간은 벌써 오후 4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일어나야 했다. 저녁시간엔 뉴욕에서 딸아이를 만나기로 약속이 돼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집을 나와 딸아이가 지정해준 트렌턴 역앞 공용주차장을 향해 차를 몰았다. 딸은 맨하탄은 복잡하여 자동차로 들어올 수 없다면서 우리가 몰고온 그 차를 그 공용 주차장에 세워둔 후, 기차를 타고 들어오라고 일러주었다. 우리는 그애 말을따라 그 주차장에 자를 세워놓은 후, 기차를 탔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제안 혹은 질문이 있는 경우 imseniorweb@gmail.com으로 연락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