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 동부여행기 1. 전갑현

by Wes posted Dec 2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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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갑현_s.jpg

 

모처럼 나들이를 했다. 8박 9일의 일정이었으니 나들이라기보다 어쩌면 여행이라 해야 할지 모른다.  

 

어쨌거나 우리집 그녀와 나는 지난 10월 28일, 8박 9일의 일정으로 자동차 여행을 떠났다. 항공편으로 갈까도 생각했으나 자동차가 더 편리하고 용의할 성싶어 그같이 결정하였다. 코비드19의 비상시기가 아직 걷히지 않아 사람과의 접촉을 가능한 피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시카고에서 살아오고 있는 우리는 뉴욕 맨해튼의 딸아이 집과  버지니아 리치몬드의 막내고모(아내의 고모) 집을 방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때문에 그 곳은 자연 우리의 여행지이자 목적지가 될 터이다. 뉴저지 트렌턴에 살고 있는 친구 집을 들른다는 계획도 물론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여행 목적지로 이름있는 관광지나 명승지 등으로 특정하지 않은 건 나무 숲들이 핏빛을 발하고 있을 도로변의 가을 단풍을 볼 수 있어 따로이 관광지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같은 나라에 살고 있으면서도 카톡이나 전화로만 대화를 나누면서 정을 쌓고 살아온 분들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까닭이기도 하다.  

 

집 떠날 계획을 세운 그녀는 준비한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사나르면서 상기된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콧노래를 부르곤 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그같은 모습을 바라보면서 얼마나 좋으면 저럴까 싶었고, 한편으론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미국에 건너와 살아온 지 36년이 돼가고 있지만 이같이 긴 기간을 함께 떠나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자영업으로 생계를 이어온 우리는 가게를 비울 수 없어 2, 3일 이상의 여행이나 나들이를 함께 하지 못한 채 살아온 것이다. 한 사람은 남아 가게 문을 열어야 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에 의해 쫓기듯, 긴장감을 풀지 못한 채, 일과 사명만으로 숨가프게 살아왔다는 뜻일 터이다. 이번 여행을 두고 그녀가 여느 때보다 들뜬 마음으로 밤잠까지를 설쳐가면서 설렘을 가질 수밖에 없는 건 그때문일 것이고,  그러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내 마음이 안쓰러워 지는 것 또한 그때문일 것이다. 

 

하여 우리는 긴장감 없는 편안한 마음으로 세상구경을 해보자는 생각으로 떠난 것이다.   

 

이같은 마음으로 채비를 갖춘 그녀와 나는 여행용으로 준비한 새 자동차에 몸을 실었다. 물론 들뜬 마음이었고, 기분 또한 상기된 채로였다. 가는 도중, 하룻 밤을 쉬어갈 요량으로 펜실베니아주 피츠버그 시에 있는 페어필드 메리어트 호텔을 숙소로 정했다. 그탓으로 자동차는 자연 그 곳을 향해 가고 있을 터이다. 뉴욕까지 쉬지 않고 운전을 하는 건 무리일 성싶어서였다. 밤새 운전을 해서라도 반드시 돌아와야 했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좀 더 여유로운 드라이브 타임을 가져보자는 생각이 있기도 하였다. 스치고 지나갈 곳이지만 그 도시 피츠버그를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본 바가 있었던 터라 그곳으로 숙소를 정하게 된 것이다. 

 

집을 출발할 때, 드라이브는 내가 먼저 하기로 하였다. 물론 피곤이 온다 든가 졸음이 들 때엔 지체하지 않고 운전대를 넘겨준다는 약속이 돼 있었다. 

 

집을 떠나 확 트인 고속도로를 나오니 기분이 상쾌하고 좋았다. 우리가 드라이브를 하고 돌아와야 할 거리는 2464 마일이었고, 4126 킬로미터였다. 1년에 1만 마일 정도의 드라이브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주행거리라 생각할 때, 3개월여 정도가 돼야 비로소 축적될 마일레이지를 단 한번으로 가질 수 있는 거리인 셈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리노이주를 떠나 인디애나주를 거쳐 오하이오주와 펜실베니아주, 뉴욕주, 뉴저지주, 메릴렌드주, 그리고 워싱턴디시를 거쳐 버지니아주까지, 무려 8개 주를 거쳐야 하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돌아올 때에도 버지니아주에서 웨스트 버지니아주, 그리고 켄터키주와 인디애나주를 거쳐 돌아와야 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모두 10개 주를 거치고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거리가 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선택한 첫번째의 길은 80번 고속도로였다. 그 80번 국도는 94번을 타고 시카고 다운타운을 벗어나 인디애나를 향해가는 길목에서 만나게 된다. 그 두 길은 인디애나로 진입하는 병목구간에서 만나 94번은 미시간 쪽으로 흐르고 80번은 그대로 뉴욕까지 뻗어있어 그 길을 택한 것이다. 지피에스도 그 길을 선택해준 건 물론이다. 

 

그 병목구간의 도로는 좀 번잡하기는 했으나 이른 아침이었던 탓으로 큰 불편없이 통과할 수 있었고, 그때문에 차는 금세 80번 하이웨이에 본격적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하여 우리는 그 시원한 고속도로를 내쳐 달렸다. 시원하게 트인 도로를 질주하면서 미국의 고속도로는 오는 길과 가는 길 사이의 여백의 땅이 여유롭고 널직이 놓여있어 시원스로워 보일 뿐아니라 안전 드라이브까지도 확보돼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는 벌써 인디애나 주를 들어서고 있었다. 중부의 곡창지대로서 곡물생산을 주 산업으로 하고 있는 인디애나 주는 그 답게 넓은 평야를 드러내 보이면서 시원하고 산뜻한 아침을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평야는 그야말로 가도가도 끝없는 들판으로 펼쳐져 있었다. 큰 산은 커녕 야산마저도 볼 수 없어 다소 밋밋한 면이 없지 않으나 그것이 인디애나 주의 멋이고 풍경이라는 생각으로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면서 기쁜 마음으로 차를 몰았다.      

 

인디애나 주 북서부에 위치한 케리멧 지방은 철과 아연이 생산되고 있는 탓으로 철강 제조업이 발달하여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때문에 이스트시카고와 인디애나 주의 게리가 미 중서부 철강산업의 중심지가 되고 있을 것이다. 이같은 제조업의 산업과 공단이 있다해도 농경지대가 주 땅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는 탓으로 곡물 생산지로서 더욱 알려져 있다. 옥수수와 콩은 인디애나 주의 가장  값을 내는 생산물이며, 농장 소득의 절반 이상의 품목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같은 곡물들의 거의가 중부의 평원에서 제배하여 생산되고 있어 그 땅과 벌판의 크기를 가히 가늠하게 한다. 이렇게 넓은 인디애나 주의 평원을 우리는 지금 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한 참을 달리자 날은 밝았고, 해는 높이 솟아 있었다. 그제서야 우리는 시장끼를 느끼면서 금강산 식후경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준비해온 것을 꺼내면서 아침은 차안에서 해결하자며 제과점 빵을 내놓았다. 물론 커피도 함께였다. 출발 전, 이것저것 챙기기도 바쁜 터에 커피까지를 끓여 마호병에 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언성높여 한마디 했던 걸 후회하였다. 따라준 그 커피를 식혀 마시면서 그녀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종종 그랬었다. 함께 집을 나설 때, 소리를 내면서 빨리 나오라고 독촉을 할때가 있었고, 그녀는 그때마다 화를 내곤 했던 게 바로 그것이다. 나는 옷하나 걸치고 나서면 그만이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여성이기 때문에 갖춰야 할 것이 있고, 함께 하기 위해 준비할 것도 있다면서였다. 그 부분의 이해 결핍으로 기다려줄 수 있는 배려와 매너가 없다면 남편으로서는 물론, 여성을 대하는 남성으로서의 기본마저도 없는 몰지각한 인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남자로서의 자격 미달은 물론, 인간으로서도 격을 잃은 그야말로 실격된 존재라는 것으로 말이다. 여성과 함께살이의 기본없는 몰상식한 인간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충고로서 그같이 혹독한 꾸지람을 들어왔으면서도 몸에 밴 습성 탓인 지 그 매너 상실로 실수를 할 때가 종종 있곤 해왔다. 인격수양이 아직 거기에 이르지 못한 까닭일 지 모른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으니까. 

 

아침 일을 잊었는 지, 그래도 그녀는 친절하게 먹을 것을 꺼내들고 나를 맞아 주었다. 기쁨 섞인 얼굴을 한 채로였다. 하여 나는 인간에게 있어 그 망각 기능은 신이 인간에게 내린 또 하나의 선물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억되고 남아있어 불행을 줄 수 있는 것들을 잊을 수 있다는 건 행복의 청량제를 마시는 것과 다르지 않을 성싶어서였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의 그같은 망각 기능을 자기보존의 생존본능이라 하는 것 같다. 

 

인간 내면에 있는 그 망각본능은 인간의 성정을 긍정적 기능으로 고양시켜줄 수 있는 힘을 가질 뿐아니라 행복으로의 길을 열어주는 데에도 역할을 해내는 긍정기능의 한 부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그같은 기능이 있다는 건 나에게 있어 더 없는 축복이라는 생각을 해보면서다. 하면서도 잊혀진 게 아니라 잊으려 해서 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잊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든가,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미안했다는 생각이 더욱 들었다.  

 

가볍게 아침을 때운 우리는 내쳐 달렸다. 

 

차는 어느새 인디애나 주를 지나 오하이오주를 들어서고 있었다. 오하이오 주 또한 넓은 평원으로 돼있음은 물론이다. 펜실베니아 주와 맞닿은 북동쪽으로는 높지 않은 야산들이 언덕을 이루고 있어 가을 단풍을 볼 수 있었다.

 

합성과 예비금속의 제조업이 발달 되어있는 오하이오 주는 기계숍을 비롯, 합성 금속 등의 공업이 미국에서 꼽을 수 있을 만큼 발달되어 있다. 특히 화학품으로서 유리, 기계, 플라스틱, 페인트, 비누, 고무제품 등의 제조업이 생산력을 갖추고 있어 주의 산업과 경제력을  받쳐주고 있는 주이기도 하다. 그때문에 그 회사들의 본사가 있는 클리브렌드와 신시네티 같은 도시가 크게 이루어져 발달해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하이오 주 또한 거대 평원이 있어 인디애나 주와 같이 농산물 생산지로서 거대 곡물을 생산하여 유통해내고 있다. 일리노이 주와 인디애나 주, 그리고 오하이오 주의 광활한 평야에서 생산된 곡물이 있어 세계에서 가장 큰 곡물시장이 시카고에 있는 지 모른다. 가장 큰 선물(先物)시장 또한 시카고에 있으니까. 

 

그러나 오하이오 주는 인디애나 주와는 달리 펜실베니아 주와 인접하고 있는 접경지역에는 산맥이 있다. 우리는 지금 그 산맥을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생각해보았다. 단풍은 역시 산맥을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해본 게 바로 그것이다. 동부의 단풍은 내가 살고 있는 시카고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아메리카 특유의 단풍산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산맥의 멀리에서 뭉실뭉실로 피어올라 아름답게 자태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오색 단풍은 풍요로운 산맥의 상징인 듯하게 바라보였고, 은근하고 그윽한 아름다움까지를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한국 단풍과의 차이점을 비교하여 얘기하면서 동부에 펼쳐진 늦가을의 만경을 즐길 수 있었다. 곁에 있는 그녀는 "야, 좋으네, 정말 좋아" 라는 감탄을 잇따라 쏟아내면서 창밖에 던져진 시선을 주체하지 못한 채, 고개마저 좌우로 두리번 거리면서 그것 보기에 혼을 잃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겐 운전이나 똑바로 하라는 주문을 연신 내리면서다. 

 

그곳은 펜실베니아 애크론 시티를 바이 패스하고 있는 80번 국도 주변의 산맥이었다.  

 

그같이 아름다운 단풍도로를 달리고 있는 사이 해는 서산으로 기울고, 자동차는 벌써 제 일의 목적지인 피츠버그에 다다르고 있었다. 우리는 숙소로 예약해놓은 페어필드 메리야트 호텔을 향해 갔고, 호텔에 도착하자 곧 짐을 풀었다.    

 

피츠버그에 도착하자 나는 다소 상기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도시 피츠버그를 한번 쯤 둘러보고 싶었던 탓이다. 언젠가 피츠버그의 헤이치필드 스타디움에서 메이저리그 야구 경기가 있었고, 그 경기를 인상 깊게 본 적이 있다. 그 경기는 시카고 컵스와 피츠버그 파이리츠가 맞붙고 있었다. 3대 1로 이기고 있었던 시카고 컵스를 9회말 경기에서 홈런을 날린 파이러츠의 마지막 타자에 의해 한번에 3점을 얻어 깔끔하게 마무리한 경기를 너무 인상 깊게 본 적이 있어 그 헤이치필드 구장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강변을 끼고 돌면서 널찍하게 자리잡고 있는 그 스타디움 주변이 너무 아름답게 보여지기도 했던  것이다. 해서 그 피츠버그를 기억하게 되었고,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 

 

우리가 피츠버그 다운타운에 도착했을 때엔 어두움이 내리고 있었다. 허드슨 강과 이스트강 사이에 든 뉴욕의 맨하튼처럼, 강남 북을 가르며 흐르고 있는 서울의 한강처럼, 피츠버그 다운타운 또한 모노피헬라 강물과 엘리피니 강물이 오하이오 강에서 만나게 되는 데, 그 만나는 삼각지점에 시나이 반도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건물 숲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반사하여 비추이고 있는 그 강물의 채색은 찬연한 강변의 멋이었고,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고색창연의 아름다움이었다. TV 화면에서나 볼 수 있는 황홀한 야경 그 자체인 듯보여지기도 하였다. 우리는 그 강변이 내려다보이는 식당을 찾아 들어 창밖을 내다보았다. 안에서 바라보이는 바깥의 풍광은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식당 가이드가 지정해준 자리에 앉으면서 그녀는 기분이 좀 괜찮았던 지 "우리, 이리로 오길 잘했네" 라고 말했고, 나는" 그렇지? 그러니까 나만 따라와" 라고 답해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치-" 라는 소리를 내면서 눈을 흘기는 것 같았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뉴욕에 있는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딸애는 우리에게 어디에 있는 지를 물었고, 나는 피츠버그 식당에 있다고 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딸은 우리에게 당부를 해주었다. 피츠버그는 낯선 사람들에게 위해를 줄 수 있는 위험성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언질이 바로 그것이었다. 

 

피츠버그는 19세기 말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그리고 독일과 아일랜드 등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크게 몰려들어 도시를 이루었다. 그러나 20세기, 특히 1940년대 이후 건설되어 설립되어진 철강과 제철산업이 육성되면서 큰 공업지역과 공단이 형성되었고, 그로인해 아프리카계 이주민들이 대거 몰려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피츠버그의 힐 지역을 중심으로 강력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공동체의 기반이 형성되어 크게 번영하게 된 것도 바로 그때부터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입된 그 인구가 전체 인구의 4분의 1정도를 넘어서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를 넘어서면서 그 철강과 제철산업은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그탓으로 실업자 수가 늘어날 뿐아니라 실업율 또한 겉잡을 수 없이 증가하여 도시민 이탈현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44만명 정도였던 인구가 38만명 정도가 된 것으로 무려 6만여 명이 빠져나간 것이다. 그로인해 도시는 황폐하게 되었고, 인심 또한 흉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들어 국제공항 건설과 개장, 그리고 보건산업 육성 등으로 도시 활성화를 꾀하였으나 그 불황기 때 드리워진 도시의 그늘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는 것이었다. 

 

이같이 그곳 사정을 이해하고 있었던 딸아이는 그곳에 있는 우리가 염려되었던 모양이었다. 제 눈에는 아직도 우리가 이방인처럼 미국 생활과 미국 문화적응에 겉돌기식 살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었던 것으로 말이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 문화적응은 물론, 일상 생활마저도 섞여들지 못한 채 이방인처럼 더부살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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